아카이브

구포 사람들

대표약사 김형정

영원한 파트너 오연지

명신약국
아픈 이들의 몸과 마음을 처방하는
구포역의 따뜻한 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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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약국을 개원하셨나요?
1961년 약사면허를 취득했는데, 당시 약종상들이 성업하던 시기로 ‘약사’라는 직업이 생소했어요. 1965년에 구포치안대 쪽에 ‘대학약국’이란 간판을 걸고 영업을 시작했어요. 현재 자리로 1972년에 이전해서 ‘명신약국’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개원 당시 구포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어요?
1963년 동래군 구포읍에서 부산진구 구포출장소로 행정구역이 바뀌었지요. 그 때는 구포1동 사무소가 읍사무소였고, 구포출장소가 사상면, 모라, 덕천동, 산성까지 관할했어요. 구포읍 인구가 약 2만 명 정도였지요.

긴 세월 약사님과 함께 약국을 지켜 온 부인, 오연지 여사님과의 남다른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던데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오연지 사모님) 저의 모친이 몸이 안 좋으셔서 남동생이 약 심부름을 다니며 약사님을 겪어보니 ‘참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사촌언니를 중매하려고 했었어요. 저도 약심부름을 해서 약사님 얼굴은 알고 있었지요. 그 때 저는 이화여대를 다녔는데 여름방학에 서울에서 친구들이 내려와 월내해수욕장에 캠핑을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상비약을 사러 약국에 갔어요. 어디에 쓸 약이냐고 물어서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내가 따라가면 안 되겠느냐” 그러더라구(웃음). 그렇게 만남이 시작됐어요. 두 해 뒤인 대학 3학년에 결혼을 해서 지금까지 부부의 인연을 이어갑니다.

중간에 잠시 정치에 입문하셨다고 하셨지요?
1995년 민자당 시의원 공천을 받아서 시의원으로 3년을 활동했어요. 항만주택위원장으로 활동했는데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1998년에 북구청장 공천을 받았어요. 그런 데 아내가 당뇨로 쓰러져 한때 혼수상태에 빠졌어요.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 데, 집에 환자가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는 거지. 가정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어서 사퇴를 했어요. 공천을 받으면 당선된다는 공식이 성립되던 때라서 주변에서 많이 아쉬워들 했어요. 주위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지만 북구의 발전을 위하여 내 나름 노력했고 좋은 경험으로 남아있어요.

일제 강점기인 1939년에 태어나서 한국전쟁(6·25 전쟁)을 겪으시고 산업화의 시대에 왕성한 활동을 하셨어요. 격동의 현대사를 궤를 같이 했는데요.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 어떠십니까?
큰 아쉬움도 후회도 없어요. 지역의 지식인으로 일꾼으로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노력하며 살아왔어요. 인생의 제일을 가정의 화목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구포이음도시재생사업과 관련하여 제안, 조언을 해 주신다면?
도시철도 구포역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석양이 장관입니다. 낙동강이란 자연 자원을 잘 활용했으면 해요. 예전의 대동 나룻배를 재현하여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춰놓으면 좋은 관광자원이 될 겁니다.

지역의 어르신으로서 젊은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
세상이 빠르게 변해서 나 같은 사람은 달음박질로도 못 따라가요. 머리가 안돌아가요.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자체를 이해 못하겠어요. 제가 지금 제 손자랑 대화가 안 됩니다. 내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저거 말을 제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 하는 게 조심스러워요.
이 동네 여러 사람이 출자를 해서 주식회사 구포유를 만들었어요. 저보고 꼭 참여해야 한다고 해서 후원하는 마음으로 10만원 출자했어요. ‘구포국수체험관’을 운영 할 모양인데, 수익보다 최고의 육수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구포역 앞에 국수가 맛있으니 먹으러 가자“ ’구포에 한번 가고 싶다‘는 마음을 먹도록 해 주었으면 해요. 출자자 중 몇 사람은 배당금을 기대하던데 앞서 운영하던 걸 보면 수입을 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100명 주주가 있다면 한 사람이 몇 사람씩 끌어오면 홍보가 되거든요. 출자를 했으니 잘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질 거고, 그런 책임감과 동네에 헌신하는 마음을 가져야 지금은 후진 동네인 구포가 좋게 변하지 않겠습니까. 구포유가 지역의 견인차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